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(문단 편집) === 왕비 === [[파일:Queen Alexandra of 1908.jpg|width=500]] 1908년, 왕비 시절의 알렉산드라 1901년 시어머니 [[빅토리아 여왕]]이 사망하여 남편 [[에드워드 7세|앨버트 왕세자]]가 에드워드 7세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알렉산드라도 왕비가 되었다. 본래 대관식은 1902년 6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에드워드 7세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[* 에드워드 7세는 담배를 워낙 좋아하는 골초였고 즉위하던 당시의 나이도 노년에 가까운 60세였기에 건강이 안 좋았다.] 8월에 거행하였다. 하지만 이미 남편 에드워드 7세와의 관계는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. 에드워드 7세가 정부와 뜰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알렉산드라가 '''"돼지 한 쌍이 뜰을 산책하고 있다."'''라며 경멸조로 말했을 정도다. 그리고 그녀는 독일인을 매우 불신했으며 독일의 확장이나 이익에 유리한 것은 무엇이든 항상 반대했다. 왜냐하면 친정인 덴마크 왕실은 [[슐레스비히홀슈타인]]이 당시 덴마크 왕실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. 그 예시로 1890년, 알렉산드라는 영국의 고위 장관들과 군인들에게 배포된 메모를 작성하여 독일의 [[헬골란트]]와 영국의 [[잔지바르]][* 영국의 보호령이었다.]와 교환할 계획에 대해 경고하면서 전략적 중요성과 그것이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. 하지만 알렉산드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교환을 진행하였다. 당시 독일의 언론은 알렉산드라와 여동생인 [[덴마크의 다우마|다우마]]를 비난하면서 두 사람이 '''"국제적 반독일 음모의 중심"'''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.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남편 [[에드워드 7세]]의 조카인 독일 황제 [[빌헬름 2세]][* 에드워드 7세의 누나 [[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|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]]의 아들]를 멸시하고 불신하며 1900년 그를 "내적으로는 우리의 적"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.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토론 중에 [[영국 서민원]]을 방문한 최초의 왕비였다. 1910년, 알렉산드라는 전례에서 크게 벗어나 [[영국 귀족원]]에서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[* 서민원이 귀족원의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]를 제거하기 위한 의회 법안이 논의되는 동안 2시간 동안 방이 내려다보이는 여성회관에 앉아 있었는데, 개인적으로 알렉산드라는 이 법안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. 그러던 중 1906년에 아버지 [[크리스티안 9세]]가 사망하였고, 1910년 남동생 [[요르요스 1세]]를 만나기 위해 [[그리스 왕국]]을 방문하던 중 남편 [[에드워드 7세]]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.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영국에 도착하였고, 마지막 몇 시간 동안 그녀는 [[에드워드 7세]]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스 실린더에서 직접 [[산소]]를 공급했다. 하지만 [[에드워드 7세]]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,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사망한 후 "돌이 된 듯 울 수도 없었다."라고 말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